그렇게 지옥같은 외주제작사를 뒤로 하고, SBS에 예능국 FD로 입사를 했더니 잠깐은 아주 꿀같은 시간이었다.
일단 외주제작사보다 두배 가까이 많은 월급을 받았고(그래봤자 160, 그 시절 최저시급이었다), 출근하는 연예인 구경도 하고, 구내식당이 꽤 괜찮다고 소문난 방송국이기도 했고, 막 유명한 프로그램 팀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.
그리고 회의는 역시 FD는 별로 할 게 없었다. 그저 분위기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 뿐.
내가 들어간 프로그램은 '김병만의 주먹쥐고 소림사'.
곧 소림사 촬영을 앞두고 있는 프로그램이었다.
내 역할은 현장진행(이라고 하고 그냥 모든 스텝의 따까리 역할하러 따라가는 애)이었고 예능 촬영 현장 특성상 스텝만 50명 가까이 되는 큰 현장이었다.
거기서 내 역할은 신입 AD와 함께 스텝의 일정과 식사를 챙기고, 촬영본 백업을 받는 일이었다.
난 세상에 태어나서 촬영본 백업이 미친듯이 헷갈리고 빡센 일이란 걸 예능 촬영하며 배웠다.
거치캠 포함해서 30대 가까이 돌아가는 촬영본을 오전, 오후, 저녁 각 1번씩 받아와서 백업을 받아야되는데 그 당시 들고갔던 후진 맥북으로 각 시간대별 촬영 끝나고 백업을 받아야했는데, 그 속도는 약 5~6시간 정도 걸렸다.
말하자면 촬영시간보다 백업시간이 더 길어져서, 계속 딜레이가 되는 그런 거지같은 상황이었다.
그렇게 저녁 촬영 끝나고 한 10~11시부터 백업을 시작하면 난 새벽 5~6시까지 백업을 받아야했다.
근데 오전 일정은 7시부터 시작이다.
뭔가 알 수 없는 희열이 처음 이틀 정도는 있었다.
왠지 내가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는 것 같고 팀에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은 희열이랄까?
(실제로 백업은 팀에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역할이다. 단지 내가 그때 심하게 들떠있었다는게 실제 역할보다 더 크게 느껴졌을 뿐이다.)
3일째 정도부터는 거의 모든 백업 작업을 거의 자면서(?) 받았는데, 아직도 빵꾸없이 백업을 다 해낸거보면 나도 많이 쫄아있긴 했었나보다.(지금 생각하면 촬영본 열개쯤 날아가도 몰랐을텐데ㅡㅡ)
그런데 또 아랫사람들끼리는 처음 손발을 맞추는거다보니 팀웍은 안맞지, 소품 준비 안되서 연예인 쪽에서는 쌍욕이 날아오지, 스텝들은 밤마다 술판 벌이지, 근처에 소품이 필요해서 사러가면 찐 중국인들 천지라 말은 하나도 안통하지, 막내로 이 광경을 지켜보면 혼이 다 달아날 정도였다.
이때쯤해서 결심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.
1. 절대, 돈 많이 주고, 업계 탑이 될 수 있는 기회라고 해도, 내 정신을 갉아먹으면 하지 말자.
2. 저~~~~얼대 그렇게 일해봤자 나한테 남는게 없다.(순전히 내 생각이다)
아무튼 그렇게 혼란한 촬영을 마치고, 돌아와서 SBS 공식 입력맨에게 파일을 넘겨주고, 서버에 업로드 된 파일 싱크를 맞춰야했다!
또 카메라 30대의 7일치 촬영본 싱크를 맞춘다는 것은 어떤 일인가... 욕이 나오는 일이다.
그러던 중 예비군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함께 촬영 나갔던 외주PD에게 연락이 와서 왜 싱크를 이렇게밖에 안맞춰놨냐며 나를 슬슬 조지기 시작했다.
모든 협업하는 일이 그렇겠지만, 되놓고 난 결과물만 보면 이 전사람이 어떻게 일했는지 모른다. 단지 결과물이 내 생각 같지 않으면 짜증이 나고 욕이 나오는 것이다. 하지만 난 이날이때껏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식으로 행동한 적은 없다.
이 피디는 그냥 죄송하다는 말이 듣고싶었는지도 모른다.
그런데 그 당시 내 성격이 그렇지 않아서 따박따박 말대꾸하고 같이 싸우다가 쫓겨났다.
또 다시 결심했다.
이해되지 않는 갈굼을 받고,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버텨야할 일은 없다고...
그 바닥에 7년을 버텨 7년차 방송PD가 되나, 방황해가며 내 마음의 안정을 찾은 그냥 PD가 되나, 내 인생에는 큰 별다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.
주변에 잘 버티며 일하는 사람 보면 오히려 마음이 아플때도 있고.(이것도 내 기준)
아무튼 이러저러한 경험을 하다보니, 자존감도 많이 깎여나가고, 방송판이 나란 놈이 버틸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하게 되면서 악순환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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